//평론//
하삼두(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 교수)
감각은 생각보다 빠르며,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없던 감각이 쉽게 생성되지도 않는다. 이유를 따져보고 호불호를 정하는 것은 감각의 1차 영역이 아니라 지각의 2차 영역이다. 원초적이고 선험적인 것들로부터 일어나는 이 ‘감각’은 예술의 세계에서는 늘 절대적이다. 모든 예술의 처음과 끝에 이 ‘감각’이라고 하는 끌림장치가 있어야 제대로 자리를 잡고 제값을 하게 된다. 심미안은 나선구조처럼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지만, 결국은 다시 처음을 돌아와 감각적 충실도에 쌓여 기억속에 갈무리가 된다.
류명렬의 그림을 두고, 떠오르는 개념이 있다면, 끌림이 만들어내는 진솔함과 바라보기 과정에서 느껴지는 무장해제이다. 그저 이유 없이 좋은 그림, 누구나의 꽃이 해바라기이듯이 누구나의 나무인 소나무라는 대상도 끌림의 요소이지만, 묘사의 현란함이 유발하는 상큼함도 그린 종류의 것이다. 뭔가를 그려도 참 잘 그린다는 말을 듣는 사람, 그 기본기를 대중의 정서와 편안히 연결시킬 줄 아는 보편감각도 이를 한층 고조시킨다. 사실, 어렵게 말하긴 쉽고, 쉽게 말하긴 어려운 것이 미술의 언어인데,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어려운 것은 어렵게 쉬운 것은 쉽게 말하는 진솔함이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이 된다는 뜻밖의 경험을 그의 그림 앞에서 맛보게 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작가론적 관점으로 작품에 의미를 덧입히거나 작품론적 관점으로 작가의 품행이 상쇄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류명렬의 소나무는 어쩐지 소나무 자체만으로도 영원히 남을 듯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다. 작품과 작가가 모두 건재해 보이는 홀가분함은 참 부럽기도 하고 화가의 입장에서는 참 샘나는 재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의 전시는 종전의 모습과는 좀 다름이 감지된다. 그간 이십년 정도 쌓아온 스스로의 벽을 하나씩 허무는 시도를 하고 있는 걸까? 대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작가 자신을 또다른 자신이 바라보려는 객관화가 실험되고 있다.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묘사되는 존재를 좌표의 원점에 두었던 과거와는 달리, 유체이탈한 또다른 자신의 사유를 좌표의 원점이 되게하는 시점이동! 시야를 수정하여 사유의 변화를 알리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된다. 작가에게 있어서 ‘객관화’라는 과제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독자적 정체성 수립을 위해 평생을 면벽정진하는 수도승의 모습에 비유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 개성의 모서리를 죽이는 일인 객관화는 세상 모든 것의 스승인 세월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변화이기에 차상위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용한 변화는 작가의 영혼 속에 하나의 하모니즘 양립요소로 떠돌아, 조형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꾸었을 것임이 틀림 없다. 류명렬의 캔바스에 비로소 이야기가 담기니 화면 안에서 말하기와 듣기가 공존하게 되었다. 그럴 때가 된 것이리라. 자신의 내부로 향한 집착이 존재의 외연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징표이다. 그 여운의 자리는 작가만의 공간이 아니라 소통과 공감의 온기를 지닌 모두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감각조율의 결과물이다. 소기의 성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변화는 모색이지만, 정체성을 획득한 존재가 변화를 시도할 때는 그만한 자기투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류명렬의 그림에서 오랫동안 여백으로만 남아있던 공간이 어느덧 이야기를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듣기의 미덕이 자리잡았고, 객관화의 울림이 커졌다. 주변으로 감각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자기중심을 넘어 더불음의 편안함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적어도 이번의 전시작품에서 감지되는 이야기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의 모습이다. 닫혔던 그의 작업실이 개방되고, 관객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비로소 독자의 쉼터를 배려한 더불음은 사적 시선이 공적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별히, 주목되는 변화인 배경효과에 시선이 머물 것이라 여겨진다. 단조로우면서도 더없이 화려한 색상의 배경, 주제인 소나무를 향해 스스로의 형상을 감추고 있는 색채유희는 작가의 심상을 얼비추는 반투막이다. 말이 혀에 오르기도 전에 감각만으로 그 느낌을 전하고 있는 원형질적 유동체는 그동안 감추고 살았던 그의 내밀한 속살이다. 내포와 외연의 조형언어가 어떤 공식으로 관계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새로움이다. 그의 소나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도 한 그루의 소나무로 정주하여 긴긴날 동안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되길 기대해본다.//하삼두//
장소 : 한새 갤러리
일시 : 2023. 11. 15 – 11. 2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